싸리나무
숙종 임금 때 암행어사로서 많은 일화를 남진 유명한 박문수어사가 젊었을 때였다.
영남 어사의 임무를 띠고 방방곡곡을 누비며 민생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바쁜 임무를 수행하느라
고을마다 마을마다 길이 있고 동네가 있는 곳은 모두 찾아 다니며 민생을 살폈다.
그러던 중 한번은 경상도 어느 산골 마을을 돌아보고, 다음 목적지를 행해서 길을 떠났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무리 걸어도
첩첩이 산만이 앞을 가로막아 도무지 인가가 나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박어사는 더욱 걸음을 재축하였으나 갈수록 산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지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짐승들 우는 소리마저 들여왔다.
박어사는 겁이 났다. 이러다가는 짐승들 밥이 되어 귀신도 모르게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다 정신을 가다듬고 저 멀리를 보니 산 한 모퉁이에 불빛이 보였다. 박어사는 무척 기뻤다.
틀림없이 불이 있는 곳에 인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불을 목표로 하고 불이 반짝이는 곳을 향해서 부지런히 걸어갔다.
얼마 후 불이 비치는 곳에 당도해 보니 과연 조그마한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박어사는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산중에서 잃은 나그네인데 하룻밤 자고 갈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그 집 안에서 한 여인이 나와서 하는 말이, 지금 이 집에는 남편이 출타 중이어서 자기 혼자만이 있는데,
외간 남자를 재울 수 없으니 딴 곳으로 가보라고 거절을 했다.
박어사는 이 외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으니, 제발 아무데서 라도 재워 달라고 애원 애원하였다.
한참 망설이던 여인은 그러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엌에 나가더니 저녁밥을 차려 왔다. 배가 고픈 박 어사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상을 물리자 여인은, 자기 집에는 잠 잘 곳은 오직 방 한칸 뿐이라 도저히 재워줄 수는 없지만, 사정이 딱해서 재워 주는 것이니
선비의 도리를 지켜서 절대로 딴 마음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게 하여 박어사는 윗목에서 자고 여인은 아랫목에서 잤는데...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얼굴을 보았더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에 비할까 인간 세상에는
이렇게 아리땁고 예쁜 여자는 없을 정도로 곱고 어여쁜 미인이었다.
말을 마치자 여인은 치마로 방 한가운데를 휘장처럼 경계를 삼고 밤이 늦었으니 자라는 것이었다.
박어사는 너무나 예쁜 그 여자의 자태에 반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집을 떠난 지도 벌써 수십 개월이 넘었으며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한 지도 너무나 오래인데, 오늘 이렇게 젊고 어여쁜 여인과
아무도 없는 외진 산골에서 단둘이 한방에서 자게 되니 박어사의 마음속에는 욕정이 막 끓어올랐다.
그래서 박어사는 잠결에 돌아눕는 척하면서 다리를 그 여인의 다리 위에 올려 놓았다.
그랬더니 그 여인은 아무 말없이 어사가 잠을 깨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다리를 살짝 내려놓았다.
한참 후에 박어사는 다시 다리를 잠꼬대인 척 하면서 다시 얹었다.
그랬더니 여인은
"먼 길을 오느라 손님이 무척 고단한 모양인지 잠버릇이 나쁘군."하면서 다시 어사의 다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자는 척하고 수작을 부리던 어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음음... 하면서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팔을 펴서 여인을 껴안았다.
그러자 여인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추상같이 엄한 어조로 호령을 하였다.
"여보시오 선비님, 일어나 앉으시오. 남녀가 유별해서 한 방에 재워 줄 구 없는 것을, 사정이 딱해서 재워 주면 그것을
고맙다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들여서 잘 자고 갈 것이지, 선비의 체통과 삼강오륜을 져버리고 유부녀를 넘보는 것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니 냉큼 밖에 나가 쌀 회초리를 해오시오!" 라고 하였다.
정신이 바짝 든 어사는 부끄럽고 창피 했으나 여인의 위엄이 너무 도도 해서 시키는 대로 밖에 나가 싸리나무 울타리에서
회초리 될만한 것을 뽑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박어사에게 종아리를 걷으라고 엄명하였다.
어사는 무엇엔가 억눌리는 듯한 위엄에 그만 종아리를 걷고 여인 앞에 섰다.
여인은 박어사의 종아리를 세차게 쳤다.
어사의 종아리에서는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한참 만에 매를 거둔 여인은 농 문을 열고 명주를 한 필 꺼내서 그것을 찢어 어사의 피나는 다리에 감아 주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이 피는 모두 부모에게 받은 귀한 것이니 한 방울도 함부로 흘려 보내서는 안됩니다
피 묻은 이 명주는 함부로 버리지 말고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앞으로도 또 이와 같은 사악한 사념에 사로 잡힐 때 자기를 바로 잡는
교훈의 신표로 하시요." 라고 하였다.
다음날 새벽 박어사는 여인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치다시피 하여 그 집을 빠져 나가 길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 그 일이 있은 지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박어사가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그래서 잘 만한 적당한 집을 찾아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그 집에도 남자는 장사 차 출타하고 여자 혼자만이 있는 집이었다.
여인은 반갑게 어사를 방으로 맞아들여 저녁상을 잘 차려 와서 저녁밥을 먹는 옆에 앉아 온갖 교태를 부리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상을 물리자 윗방에 어사의 자리를 마련하고 잘 자라는 인사를 여러 번하고 방문을 닫았다.
어사는 먼 길을 걸어오느라 피곤해서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가만히 방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속옷 바람의 주인 여자가
어사의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 드는 것이 아닌가?
어사는 몇 달 전 싸리 회초리로 매맞은 생각이 불현듯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흐트러진 주인 여자를 보고 호령을 하였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가 이게 무슨 짓이요! 오륜을 저버린 이 파렴치한 행동은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니 냉큼 밖에 나가
싸리 회초리를 꺾어오시오." 하고 위엄을 갖추었다.
여인은 어사의 위엄에 기가 질려 시키는 대로 회초리를 만들어왔다.
어사는 여인의 종아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그때였다. 다락 문이 갑자기 열리며 한 장정이 손에 시퍼런 도끼를 들고 방으로 뛰어 내려와서, 방바닥에 엎드려 어사에게 말을 했다.
"손님, 저는 저년의 남편입니다. 소문에 저년의 행실이 좋이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위를 확인해서 이 도끼로 요절을 내려고
며칠째 다락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오늘 하마터면 귀한 분을 해칠 뻔했습니다."하는 것이었다.
박어사는 온 몸이 오싹했다.
전에 싸리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며 훈계를 받지 않았던들 오늘 이런 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그 산속의 여인이 더욱 고맙고 신기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