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나무 전설
먹을 수 있어 참꽃이라 불리는 진달래가 지고 나면
야산에는 꽃 속에 독을 점점이 박아놓은 개꽃 철쭉이 한창입니다.
김 부잣집 열여섯 살 진이 아가씨는 뒷산에 올라가 전번에 자기집 머슴 육손이가 따다 주어
먹어보았던 꽃을 생각해내고는 등 밝힌 분홍이 너무 예뻐서 철쭉을 몇 점 뜯어먹었습니다.
진이 아가씨를 뒤쫓아온 육손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가씨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꽃을 토해내게 해서 아가씨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깨어난 아가씨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양들도 골라먹을 줄 아는 개꽃 참꽃도
구별 못했던 창피스러움에 ‘끔찍하고 징그러운 손으로 나를 살리다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심한 말을 뱉고는 급하게 산을 내려 갔습니다.
열일곱 살 육손이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 착실한 김 부잣집 머슴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린 아가씨를 사모하는 마음이 자라 아가씨가 즐겨 입는 저고리처럼
샛노란 개나리만 보아도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이 울렁거리고,
아가씨가 거처하는 뒤채를 바라보면서 일없이 웃음을 떠올리곤 했었습니다.
아무도 몰래 아가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키우던 육손이에게 아가씨의 말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철부지 아가씨는 그 뒤로도 곧잘 육손이를 놀렸습니다.
손이 무겁겠다느니, 병신이라느니, 괴물 같다느니 하면서...
사모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육손이는 불쑥 튀어나와 있는 여섯 번째 손가락을 볼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칼로 잘라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뒤채 뜰 안에 심어져 있는 엄 나무가 다섯 손가락 활짝 펼친 잎사귀를 보면서 늘 부러워했습니다.
소쩍새가 울 즈음 건너 마을 박 도령과 진이아가씨의 혼담이 오갈 때는 괴로워하며 마음만 태우다
결국 자리에 눕게 된 육손이는 엄 나무로 피어 나서 아가씨를 지키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뒤 뒤채의 엄 나무 가지에선 부끄러워하며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잎이 돋아 났고,
더운 날 엄 나무의 여섯 개의 손가락 잎은 아가씨의 방을 향해 부채질을 해주곤 하였습니다.
깊은 여름 그 마을엔 걸리기만 하면 거의가 죽어 나가는 사공통이라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진이 아가씨도 그 병에 걸려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고열과 구토 두통에 시달리며
목숨이 고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회생 가망이 없다며 의원도 돌아가고 아가씨는 탈진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깊은 어둠 속에 아가씨의 영혼을 데려가려고 저승사자가 도착했습니다.
저승사자는 기척 없이 뒤채로 들어 가려다가 엄 나무 가시에 도포 자락이 걸려 멈추게 되었습니다.
엄 나무의 육손 잎사귀들이 사자의 몸에 꼭 달라붙어 발걸음을 묶었습니다.
사자는 곤봉을 휘둘러 가지를 내리치고 잎새를 찢고 떼어내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여섯 손가락들은 죽어라 그를 잡고 늘어져 새벽 닭이 울 때까지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결국 저승사자는 엄 나무 가시에 한 조각 도포자락만 남겨놓고 떠나갔고
아가씨는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진이 아가씨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찢겨 너덜너덜해진 육손 잎사귀 마다
발라주면서 말했답니다.
네가 진짜 육손이라면 네가 나를 용서한다면 손가락을 하나만 더 내 보여줘…
그때부터 엄 나무 잎은 일곱 손가락을 자랑스럽게 피웠답니다.
가시도 씩씩하게 돋구고 손바닥을 쫘악 펼치면서 보란 듯이 내밀고 있습니다.
그 후 진이 아가씨는 육 손이 엄 나무 옆에 엄 나무를 한 그루 더 심어
나무의 껍질을 한쪽씩 긁어내고 끈으로 묶어 두 나무가 한 나무로 되는 연리목(連理木)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위로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