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의 전설
어느 마을 부잣집에 혼기가 꽉 찬 어여쁜 처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차니 혼담이 들어와도 달리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을 뒷산에는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절에 있는 탑 주위를 돌며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처녀는 탑돌이를 하기로 하고, 밤에 식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게 해달라."고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탑돌이를 하던 중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새벽에 젊은 스님이 잠에서 깨어나 새벽 불공을 준비하러 나오다가 쓰러진 처녀를 발견하였습니다.
스님이 처녀를 방으로 데려가 아랫목에 눕힌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니 처녀가 깨어났습니다.
그녀는 눈앞의 젊은 스님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마음속으로 찾고 있던 바로 그 이상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속세를 떠난 스님을 사랑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녀는 그 스님을 사랑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새벽 예불 법고가 울리자 스님은 가사 장삼을 챙겨 입고 방을 나갔습니다.
처녀 역시 몰래 방을 빠져나와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그 스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속으로 스님이 자기 집으로 탁발이라도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처녀는 하루하루 야위어 갔습니다.
유명한 의원을 모두 불러 치료해도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마지막 소원이나 들어주리라고 생각한 부모는 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뒷산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게 해주세요."
처녀의 부모는 부유하였기에 쌀 백 가마를 싣고 불공을 드리러 갔습니다.
처녀의 목적은 오직 그 스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녁 무렵 스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모습을 보자 처녀의 얼굴에는 이내 생기가 돌았습니다.
스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기쁨을 느껴 살 것 같았습니다.
부모들은 내막도 모르고 불공을 드려 딸의 병이 나았다고 계속 절에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자 그 스님은 다른 절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처녀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매일 절에 와서 그 스님이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 하였는데 그 스님이 보이지 않자,
'차라리 죽는 게 났겠지',
'불을 지르면 그 스님이 나오겠지?'하고 온갖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 얼굴 한 번 보고 불에 뛰어 들어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드디어 숲 속의 낙엽을 모아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만 불이 번져 삽시간에 절을 태워버렸습니다.
모든 스님들이 뛰어나왔지만 그 스님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스님은 미처 나오지 못하고 타 죽은 것으로 생각한 그녀는
그 스님 얼굴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과, 스님을 불에 타 죽게 만든 죄책감에 그만 마지막 불길에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주지 스님이 불 속에서 죽어가는 그 여인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처녀는 주지 스님 팔에 안긴 채 그 스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다 말한 다음,
"한없는 슬픔을 안고 저 세상으로 갑니다."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시신을 안고 절 뒤 좋은 땅에다가 그녀를 묻어주었습니다.
이 절을 떠난 그 스님은 다른 절에서 참선을 하였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제는 큰 스님이 되었습니다.
큰 스님이 된 스님이 옛날 수행하던 곳이 그리워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절은 온 데 간 데 없고 새로운 절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새 절의 주지 스님이 옛날 스님을 맞이 하였고,
그리고 선임자 주지 스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모두 해주었습니다.
처녀가 묻힌 곳으로 큰 스님을 안내하였습니다.
자기 때문에 가엾게 생을 마쳤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녀의 처지가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낭자 여, 이제 그대의 넋이 위로 받을 차례인 것 같소이다."
스님은 낭자의 시신을 화장 하여 그 재를 자기 바랑에 챙겨 넣었습니다.
"낭자 여, 그대는 내가 가는 곳마다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 곳에 있지 못하는 사람 가는 곳 어디에나 낭자가 있도록 그대를 걸음마다 뿌리겠소. 온 강산에 그대가 있도록 하겠소."
스님은 가는 곳마다 재를 뿌렸습니다.
재는 바람 따라 여기저기 온 강산에 흩어져 뿌려졌습니다.
봄이 되었습니다.
흩어진 재의 알갱이에서 새싹이 돋아 나왔습니다.
스님들이 해제할 무렵인 백중 절이 다가오면,
가늘고도 긴 줄기 위에 눈물겹도록 맑은 그리움을 상징하는 흰 꽃과,
애절한 그리움으로 멍든 마음을 상징하는 보라색 꽃이 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