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아비 바람꽃의 전설
고려 후반기인 충선왕 때...
이때 향리들은 후기의 사회적 경제적 변동을 겪으면서 중소(中小)지주로 성장했는데 그 자제들이 학문적 교양을 쌓고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 하는 경향이 높았고 이것이 젊은이들의 꿈이기도 했었다.
김해 무점에 사는 청년 김태은도 향리의 외아들로 태어나 자기와 같은 신분의 다른 젊은 이들처럼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젯골 金靈泉 부근에 자리잡고 그 물을 마시며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덕분인지 태은은 과거에 무난히 합격하여 청운의 꿈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이젠 결혼할 나이가 되어 부모들은 혼사 일를 걱정했으며 여러 곳에서 혼담이 오갔다.
숙고 끝에 논실마을 李 씨 집안의 딸과 결혼하기로 했다.
태은이는 꿈 같은 신혼의 나날이 흘갔지만 3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부인에게는 태기가 없었다.
몇 대 외동으로 내려온 집안에서 예사 일이 아닌 것으로 부모님과 함께 온 가족이 걱정이 되었다.
태은의 부인에게 이것이 강박관념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았으나 이름 모를 병이 들었다.
여러 의원의 약을 먹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온 가족 특히 남편의 병구환의 지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회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것이다.
부인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는.
"여보! 당신께 미안해요. 내가 죽거든 이 흰 모시저고리를 만지며 마음을 달래세요. 그리고 새 아내를 만나거든 이 옷을 묻어주세요."
남편은 이 말을 듣고 부인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복 바쳐 오르는 슬픔을 감 출 수 없었다.
이 말을 남긴 지 이틀 후 결국 부인은 이승을 하직하고 태은이는 혼자의 몸이 되었다.
진심으로 부인을 사랑한 태은이는 밤마다 저고리를 안고 자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재혼을 독촉했었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어떤 낭자가 물을 길러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홀아비의 마음속에 회오리 바람이 일게 된 것이다.
태은이는 낭자를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어렵게 인연이 닿아 낭자와 밀회를 하게 되었다.
이젠 전 부인이 준 모시저고리를 만지기도 싫고 오히려 거북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피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말한 대로 이 모시저고리를 묻어 버리자'
그는 한 손에는 호미, 한 손에는 저고리를 들고 과거 준비 때 오르내렸던
서젯골 금령천 약수터 아랫길 옆에다 모시 저고리를 묻었다.
그리고는 청혼의 절차를 거쳐 재혼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봄 그 묻은 자리 위에 흰 꽃이 여러 송이 피어난 것이다.
그리고 진한 향기가 났었다.
태은이는 이 꽃을 보면서 만감이 스쳐갔다.
그 후 사람들은 이 꽃을 "홀아비 바람꽃"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홀아비 바람꽃은 해마다 봄이 오면 진한 향기를 뿜으면서 희고 소담스레 피어나고 있다.